역사

세계의 운명을 좌우한 1918 독일혁명 ①


올해는 독일혁명 100주년이다. 독일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노동자혁명이 러시아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잠재력과 함께 이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정확히 보여주었다.

전쟁에 대한 열광에서 전쟁에 대한 혐오로

1914년 8월 1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까지 “계급의식적인 독일 노동자계급이 전쟁광들의 음모에 격렬히 항의하고 있다”고 선언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터지자 “우리의 임무는 우리나라의 문명과 독립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돌변했다. 독일 제국주의 강도들과 한 편이 돼 타국 노동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한 것이다.
11월에야 비로소 사민당 의원 92명 가운데 리프크네히트만이 홀로 당 규율을 공공연히 거스르며 전쟁공채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점이 드러났다. 거리의 군중은 애국주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반전집회를 조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전쟁 자체가 대중의 분위기를 변화시켰다. 휴가 나온 병사들은 전쟁의 공포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시에 식량배급이 중단된 1916~17년 겨울에는 많은 노동자가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수백만 노동자가 징집돼 전선으로 끌려갔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 반전집회 참가자들도 늘어났고, 1917년 2월 러시아혁명 직후인 4월에는 전쟁반대자들의 주도로 빵 배급량 삭감에 반대해 20만 명의 금속노동자가 파업에 나서기도 했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직후인 1918년 1월 28일엔 베를린에서 40만 명이 파업했으며, 다른 50개 도시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키일 수병 반란에서 전국의 혁명으로

1918년 11월에는 독일 북부 키일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차 대전에서 완패행진을 하던 독일이 뜻밖의 승리를 기대하며 10월 말에 수병들에게 영국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수병들은 지배자들의 탐욕을 위해 목숨을 헛되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년 전 수동적 반란의 실패를 교훈 삼아 대담하게 무장반란을 일으켰다. 수병들은 무장한 채 파업 중인 부두노동자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고 진압군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2만 명이 모인 대중집회에서 병사평의회를 선출했다.
키일 군항의 수병 반란 소식은 곧 근처의 다른 항구들로 전해졌다. 48시간 만에 쿡스하펜과 빌헬름스하펜에서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노동자 병사평의회를 선출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인근에서 가장 큰 도시인 함부르크의 경우, 4만 명이 즉흥적인 ‘비공인’ 시위에 참가했으며 ‘노동자평의회공화국’에 찬성했다. 이제 그 어떤 것도 혁명의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등 남부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이제는 북부의 항구도시에서 온 수병들이 각 도시로 혁명을 전파시키는 불꽃이 되었다. 베를린도 머지않아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알렉산더 황제연대가 혁명의 편으로 넘어왔다. 병사들은 막사를 뛰쳐나와 밖에서 환호하던 군중들과 하나가 되었다. 남자들은 감격에 겨운 악수를 나눴으며, 여자들과 소녀들은 병사들의 군복에 꽃을 달아 주며 포옹했다. 장교들은 계급장과 금테 장식을 떼어버렸다. 노동자와 병사들의 헤아릴 수 없는 행렬은 길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갔다. … 트럭의 기관총 주위나 징발된 민간차량에서 소총을 무릎 위에 받쳐놓은 사람들은 모두 강철 같은 혁명적 결의로 충만했다.”
(<패배한 혁명>, 71쪽)

(다음 호에서는 1923년까지 독일혁명이 어떻게 전개됐으며, 교훈은 무엇인지를 간단히 다룹니다)

편집국